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국-스페인 전쟁 (문단 편집) == 결과 == [[파일:external/www.latinamericanstudies.org/shafter-toral-surrender.jpg]] [[미 육군]](좌)에 항복하는 [[스페인 육군]](우) [[카리브 해]]와 [[스페인령 필리핀|필리핀]]에서 모두 참패한 스페인은 결국 종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1898년]] 12월 10일 [[파리 조약|파리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스페인은 [[쿠바 도독령|쿠바]]의 독립을 인정하고 [[괌]]과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 할양했으며 필리핀도 2,000만 달러라는 헐값에 넘겨야 했다. 이는 스페인 식민지의 '''거의 대부분'''이었다. 이로써 화려한 [[스페인 제국]]은 사실상 종식되었고 [[아메리카]]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팔라우]]와 [[미크로네시아 연방|캐롤라인 제도]], [[북마리아나 제도]]는 여전히 스페인령이었으나 이것만으로는 사실상 의미가 없었으며 그나마 패전으로 인해 유지할 능력이 없던 스페인은 [[1899년]] 식민지 확대를 꿈꾸는 [[독일 제국]]에게 그나마 제값(1700만 마르크)을 받고 파는 형태로 포기해야 했다. 독일 제국은 스페인으로부터 사들인 태평양 제도를 자신들의 식민지인 [[독일령 뉴기니]]에 포함시켰다.[* 그런 독일도 뉴기니, 태평양 제도, [[독일령 동아프리카|탄자니아]], [[남서아프리카|나미비아]], [[독일령 카메룬|카메룬]], [[독일령 토고|토고]], [[키아우초우|칭다오]] 등 갖고 있던 식민지들 대부분을 미국-스페인 전쟁 패전 이후의 스페인처럼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인해 몽땅 잃었다.] 이 전쟁의 패전으로 스페인은 [[남미]]와 [[북중미]]에 500년 가까이 유지하던 [[쿠바 도독령|쿠바]]를 잃었으며 미국이 [[대서양]]의 패권국으로 등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쿠바의 경우 스페인의 또 다른 본토로 여겨지기도 했기에 여파가 컸다. 이 시점에 스페인의 남은 식민지는 [[북아프리카]]의 [[스페인령 모로코]]-[[스페인령 사하라]]와 [[중앙아프리카]]의 [[스페인령 기니]] 정도 등만 남은 상태였다. 그나마 [[스페인령 기니]]도 이후 파리 조약의 결과로 기존 스페인이 영유권을 주장하던 [[나이저 강]] ~ [[가봉]]의 오고웨 강(Ogooué) 영역에서 북쪽과 남쪽을 각각 [[독일 제국|독일]]과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에 넘겨주고 영역이 축소되었다.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결국 이들을 독립시키거나, [[1956년]]에 독립한 신생국가인 [[모로코]]에게 영유권을 넘겼고 현대에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세우타]]와 [[멜리야]], [[카나리아 제도]]만을 자치 도시(Autonomous cities)와 자치 지방으로 유지하고 있는데 그나마 이게 가능했던 것도 현지 주민들이 대부분 스페인 본토 출신 이주민인 데다 본토와의 거리가 비교적 가까워서 본토와의 동질성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 외 남은 북아프리카의 스페인령 섬들[* 영구 정착 거주민이 없고 군사기지만 있다.]은 [[플라사스 데 소베라니아]]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중앙정부 통치하에 있다. 미국은 [[카리브 해]]의 패권을 차지하여 [[먼로 독트린]]을 무력으로 실현시켰다. 또 필리핀을 차지함으로써 서태평양과 [[아시아]] 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이로서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에 걸친 새로운 제국을 건설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스페인이 이 시점에서 몰락하고 그 왕관을 미국이 넘겨받았다고 생각하면 쉽다. 미국의 승리 요인 중 하나는 [[쿠바인]], [[필리핀인]]과의 전투가 아닌 철저하게 '''[[식민제국]]인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해방과 독립을 약속한다'''는 확실한 명분을 가지고 스페인군만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실제로 쿠바 상륙 초반부터 막시모 고메스(Máximo Gómez)가 이끄는 반 스페인 저항군이 합류했고 미국 국내에서도 [[마크 트웨인]]같이 본질을 꿰뚫어 본 인물도 있었지만 [[시어도어 루스벨트]]같이 [[배달의 기수]] 미국에 대한 환상으로 자발적으로 참가한 사람도 많았다. [[미국 흑인|미국 국내의 흑인 공동체]]도 쿠바 독립군을 강력하게 지원하고 전쟁 수행을 지원했으며 [[부커 T. 워싱턴]] 같은 흑인 지도자도 전쟁 수행을 독려했다. 침몰한 메인 함에서 사망한 33명의 흑인 승조원들도 주 선동 수단으로 쓰였다. 어쨌건 명분은 쿠바의 독립이었으니 [[미국 통치기 쿠바|4년간 군정]]을 실시한 후 [[1902년]] [[미국]]은 [[쿠바]]에게 제국주의적 야심이 없다(?)는 것을 과시할 요량으로 쿠바를 전격 [[쿠바 공화국(1902~1959)|독립]]시켰다. 그러나 [[관타나모]]를 미국에 헐값으로 임대해야 했으며 정치·경제·사회 모든 면에서 미국의 입김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무늬만 독립국인 사실상 속국이었다. 이는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 혁명|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관타나모]]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미국이 이용 중이다. 일부 미국 사가들은 쿠바를 [[푸에르토리코]]처럼 미국에 귀속시켰어야 했다며 '''[[쿠바]] 독립을 미국 역사상 가장 치명적 실수 중의 하나'''라고 평하기도 한다.[* 다만 애초에 전쟁 명분이 "쿠바 독립을 돕는다" 였는지라 쿠바 귀속은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가능은 했겠지만 욕을 엄청 많이 먹었을 것이다.] 참고로 노예주-자유주 대립이 심화될 때 '쿠바를 점령해 노예주로 삼자!'는 운동이 있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쿠바를 합병하지 않는다' 는 법률이 제정되어 지금까지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미국은 필리핀에 대해서는 이런 약속을 하지 않았으므로 처음부터 식민지로 간주하여 독립 세력을 인정하지 않고 독립 역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독립운동 세력은 미국에도 저항했고 결국 미국과 필리핀 독립세력과의 전투가 벌어진 끝에 필리핀 독립세력은 미군에 의해 진압당했다.([[미국-필리핀 전쟁]]) 미국이 오기 전에 이미 필리핀은 [[필리핀 제1공화국|독립 상태]]였고 정부와 대통령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 미국은 스페인의 [[필리핀 도독령]]뿐만 아니라 당시 필리핀 영토에 속해있지 않았던 [[민다나오 섬]], [[술루 술탄국|술루 제도]] 등을 [[1912년]]까지 무력 점령하여 [[미국령 필리핀]]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미국은 제국주의적 야심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필리핀 통치를 어디까지나 '필리핀의 독립을 위해서'라고 선전했고 이 때문에 다른 식민지에 비하면 많은 자치권을 보장해 준 편이지만 친미 지주 계급인 필리피노스들에게 이권을 보장해 주고 그들을 잘 대해 주었을 뿐 일반 필리핀인들은 여느 식민제국들과 마찬가지로 착취의 대상이었다. [[대서양]]-[[태평양]] 두 대양에 걸친 국가를 건설하다 보니 해군력의 분산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아직 열강에 비하면 허약했던 미국의 [[미 해군|해군력]]을 괜히 분산시키다간 참패할 것이 분명했는데 그렇다고 전력을 집중시키면 나머지 한 쪽 대양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아메리카 대륙 최남단의 [[마젤란 해협]]을 돌아가는 길은 너무 멀었고 결국 미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게 되었다. [[일본 제국|일본]]도 엉뚱하게 이 전쟁의 혜택을 얻었다. 부족한 해군 전력으로 독자적인 [[미국령 필리핀|필리핀]] 방위를 보장할 수 없었던 미국[* 심지어 [[영일동맹]]까지 고려해야 했다.]이 [[카츠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과 서로 필리핀과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상호 인정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